['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마음과 세계에 관한 질문과 답




 

어느 날 한 편의 애니가 다가왔다

 

가슴에 품고 사는 질문들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천국과 지옥은 어떤 곳일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나.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어떤 역할을 할까.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신학적인 마음 속 질문들은 고요하고 평온한 날보다는 고단하고 힘든 날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떠오르곤 했다. 그 질문들은 애초부터 답이 없었고, 답이 있다고 한들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스스로 문제를 내고, 그에 스스로 답을 하는 것. 나는 그게 인생을 채워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게 어느 날 한 편의 애니가 다가왔다.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애니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 번복작이라고 알려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The Boy and the Heron, 2023)>. 평범한 영문 제목과 다른 사뭇 진지한 한글 제목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동화같은 애니가 아니라,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지, 또는 살아야 하는지 다소 무겁고 딱딱할 수 있는 주제의 애니를 보여주겠다는 다짐과도 같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요시노 겐자부로의 청소년 소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1937년)>의 제목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이 책은 어린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게 어머니가 권장한 책이기도 하며, 애니 안에서도 주인공 마히토에게 그 어머니가 남긴 책이기도 하다. 애니에서 책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소개되진 않지만 책 제목만큼은 애니의 주제를 강렬하게 관통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가슴에 품고 사는 질문을 이끌어내는 화두이자, 애니 안에서는 마히토의 선택과 결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실제 책의 내용은 애니와 다소 거리가 있다고 하지만, 그 제목만으로 감독의 주제의식을 종합하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동안 몇 차례 은퇴를 선언하고 번복했던 못미더운 감독이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감독의 나이 그리고 주제의 무게감을 볼 때 진짜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평가, 내용의 모호함을 지적하는 리뷰가 넘쳐나면서 단순히 마지막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이라는 희소성이 아닌 나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지적 호기심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너무 늦지 않게 꼭 보고 싶었고, 마침 기회가 있어 2023. 11. 11. 토요일 영화관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아래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애니, 진지한 질문을 시작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전반적으로 색감이 어둡다. 그동안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들이 밝고 화사하며 명랑한 색상들로 동화적인 분위기를 연출된 반면, 이번 작품은 초반부터 의도적으로 톤다운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작품 배경에 따른 의도된 색감일 수도 있고, 주인공 마히토의 내면이 투영된 연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애니가 무겁고 딱딱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제목에 이어 감독이 선택한 컬러에서도 다시 한번 느꼈다.

 

주인공 마히토는 병원 화재로 엄마를 잃은 11살의 소년이다.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트라우마와 그리움이 강하다. 마히토의 아버지는 전투기 부품을 만드는 군수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마히토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 고향이자 아버지의 공장이 있는 시골로 내려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새 어머니이자 어머니의 동생 나츠코를 만난다. 나츠코는 마히토의 동생을 가진 상태다.

 

영화를 보기 전,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애니의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과 이모가 새 어머니가 되었다는 점에서 거부감과 불편함을 느끼는 관객이 많다는 기사를 읽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공감은 가지만 그 두 가지 포인트가 애니 전반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주인공 본인이 전쟁의 비윤리성과 책임을 느낄만한 나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새 어머니가 어머니의 동생이라는 것은 어머니와 닮았지만 어머니가 아닌 심리적 불편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보인다. 다만, 마히토의 심리를 지배하는 큰 사건은 화재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이었으며, 어머니가 있던(입원중이었는지, 근무중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병원의 화재는 전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즉 국가와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이 한 개인의 비극을 가져온 원인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당사자의 내적 심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논리적 연결고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흐름은 애니 전체의 주제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되는 중요한 전제가 된다. 

 

 

관계의 단절은 생명성의 부정

 

마히토는 어머니의 고향 저택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그 곳에는 7명의 하녀 할머니들이 함께 살며 마히토의 가족을 돕고 있고, 아버지의 공장도 근처에 있다. 새로운 학교에 나간 마히토는 다른 학생들과 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 돌을 들어 머리를 찧는다. 피를 흘리며 돌아온 마히토는 학교 가는 대신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 어머니 나츠코가 저택 근처 숲 속으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키리코 할머니와 함께 나츠코를 찾아 나서는데...

 

어머니를 그리워 하던 마히토가 선택한 결정은 관계의 단절이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은 관계의 망 안에서 비로소 생명성을 유지할 수 있기에, 관계의 단절은 곧 생명성의 부정을 의미한다. 마히토는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한 나츠코에 대해 마음을 열지 않았고, 밤낮으로 챙겨주는 하녀 할머니들에게도 시큰둥해 한다. 새로 등교한 학교에서는 싸움을 벌이고, 오히려 자해를 해서 사건을 키웠다. 관계의 단절은 자꾸 자신을 찾아오는 왜가리를 나무칼로 쫓아버리려고 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 정점을 이룬다. 

그렇게 스스로를 고립시키던 마히토를 역설적으로 끄집어낸 것은 나츠코가 갑자기 사라진 사건 때문이었다. 나츠코가 홀로 숲으로 들어가는 걸 유일하게 목격한 사람이기에 마히토는 그녀를 찾아 숲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숲 속에서 마주친 오래된 탑. 그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왜가리. 어머니의 환상을 만난 마히토는 주저없이 왜가리의 안내에 따라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 들어간다.

 

 

 

따로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는 이종(異種)의 세계

 

애니가 묘사하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와는 닮았으면서도 사뭇 다르다. 마히토가 바닷가에서 처음 깨어나는 것을 보면서 영화 <인셉션>이 연상될 수 있다. <그대들은...>의 장면에서 <인셉션>이 떠오르는 것은 꿈이라는 소재를 다루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비현실적 경험은 꿈이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밤 꿈을 통해서 따로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는 이종(異種)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히토가 들어선 이종의 세계는 현실과는 분명 다르다. 바닷가에 살고 있는 펠리컨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잡아먹으려고 떼로 달려들고, 바다에서는 아주 오래전 멸종한 고대어류와 같은 물고기가 잡힌다. 유령처럼 형태만 남아있는 존재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의 존재로서 말랑말랑한 지방이처럼 생긴 '와라와라'들이 모여살기도 한다. 이 곳에서는 마히토 외에도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하녀 할머니 중 하나였던 젊은 키리코, 마히토 어머니의 어린 시절인 히미 그리고 신비로운 탑을 세웠다고 알려진 큰할아버지이다. 마히토가 들어간 이종의 세계는 그 세 사람에 의해 창조되고 움직인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절대악과 절대선은 없다

 

물고기를 잡아 내장으로 와라와라를 살찌우는 키리코. 모여살다가 충분히 성숙하면 인간이 되기 위해 하늘로 떠오르는 와라와라. 하늘에 떠오르는 와라와라들을 잡아먹는 펠리컨들, 그 펠리컨을 불로 물리치는 히미. 와라와라를 잡아먹는 펠리컨들이 악한 존재 같지만, 그들은 그렇게 운명지워졌을 뿐 악이라고 보긴 어렵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 앵무새들도 존재하는데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일 뿐 악으로 묘사된 것은 아니다. (차원의 문을 통해 앵무새 몇 마리가 현실로 나가는데, 그저 현실에서는 작고 예쁜 잉꼬일 뿐이다) 키리코 역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어부지만, 물고기는 와라와라와 형태없는 존재들을 살리는 양식이 되므로, 악역은 아니다.

그저 이곳은 몇 종 안되는 생명체들이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된 상호 부조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키리코가 컴컴한 땅 바닥에서 살고 있는 반면, 큰 할아버지는 높은 계단 끝의 화려한 정원이 꾸며진 궁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 것도 흥미롭다. 앵무새 왕과 병사가 이 정원에 들어서면서 묻는 말이 생각난다. "이 곳은 천국인가요? 극락인가요?"

우리는 천국이나 극락이 지옥과는 다른 곳이라고, 다른 곳이어야 한다고 흔히 생각한다. 천국은 절대선, 절대행복, 절대기쁨만 존재하는 영원한 즐거움이 넘치는 곳으로, 반대로 지옥은 절대악, 절대불행, 절대고통만 존재하는 영원한 괴로움이 존재하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대들은...>에서 보여주는 이종 세계는 와라와라와 펠리컨이 뒤섞여 살아가는 곳으로 선악이 혼재되어 있는 우리 현실과 그닥 다르지 않다. 삶의 방식에 따라 천국이 지옥이 될 수 있고, 지옥이 천국이 될 수 있는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겨울이 악이 아닌 것처럼, 여름이 선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사계절의 변화가 있고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을 뿐이다. 만약 이 곳과는 별개의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대들은...>의 상상대로라면 이 곳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놓여진 환경 속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따라 선과 악은 비로소 정의된다. 천국과 지옥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겨울에는 겨울에 맞는 행동을 하고, 여름에는 여름에 맞는 행동을 하면 그것은 선이고, 천국의 삶이다. 만약 거꾸로 한다면 그것은 악이고, 지옥의 삶이 된다. 우리가 사는 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는 바로 우리의 삶이 결정한다.

그렇다면 우리 세계와 이종 세계는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일까. 그저 평행하게 존재하는 또 다른 우주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면 하나는 다른 하나의 상상의 산물인가. 

<그대들은...>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탁월한 상상을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진행되는 평행 우주

 

마히토가 이종 세계에 진입하는 순간, 시공간과 존재의 개념은 뒤틀어진다.

마히토가 제일 먼저 만났던 사람은 하녀 할머니들 중 하나인 젊은 키리코이다. 키리코는 펠리컨들로부터 마히토를 구해주고, 괴상하게 생긴 물고기를 잡아 집으로 돌아온다. 재미있는 건 키리코의 집에서 마히토가 잠을 자는 곳은 식탁 아래, 그것도 하녀 할머니들의 모양이 새겨진 인형들로 둘러싸여서이다. 키리코는 이 인형들이 마히토를 지켜준다고 설명한다. 

마히토는 현실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종 세계에서도 하녀 할머니들의 보호를 받는 셈이다. 누군가를 보살핀다는 감정은 시간과 공간 심지어 존재의 형태를 초월하는 일이다. 살아 숨쉬는 인간인지, 나무에 새겨진 인형인지 <그대는...>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사랑과 중력은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설명과 일맥상통하는 장면이다. 

시공간과 존재의 변형은 마히토가 어린 소녀 시절의 엄마 히미를 만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앞에서 설명했듯 히미는 와라와라의 여행을 방해하는 펠리컨들을 불을 쏴서 무찌르는 역할을 하는데, 펠리컨이 절대악이 아니듯 히미의 그런 역할도 절대선임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음과 양을 조절하듯 이종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히미와 마히토는 히미의 동생이자 마히토의 새엄마인 나츠코의 산실에도 가게되고, 그곳에서 마히토는 나츠코의 속마음을 듣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시공간의 변형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마히토는 나츠코를 처음 엄마라고 부른다)

클라이맥스는 큰 할아버지의 세계관을 기초로 이루어진 이종 세계가 무너질 때, 마히토와 키리코는 현실 세계로 그리고 히미는 히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히미는 화재로 죽게될 운명임을 알면서도 마히토를 만나 행복했다면서 예정된 과거의 시간선으로 다시 돌아간다. 마히토와 키리코 역시 나츠코를 찾아 헤매던 현실의 시간선으로 돌아온다. 이처럼 이종 세계는 여러 세계를 서로 이어주는 플랫폼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때 여러 세계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각각의 시간선이 된다. 적어도 이종 세계를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 미래는 동시에 진행되는 평행 세계이며, 다른 세계로 이어질 수 있는 평행 우주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종 세계의 정체는?

 

이제 마지막이자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았다.

따로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이며, 절대악과 절대선이 없는 곳. 그러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접속할 수 있는 평행 우주인 신비하면서도 이상한 곳. 이러한 이종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며, 그 접속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대는...>에서는 이종 세계가 바로 큰 할아버지의 세계관인 것으로 설명한다. 큰 할아버지의 옆에 떠 있는 거대한 외계의 돌은 세계관을 실제 세계로 구성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큰 할아버지가 쌓아올린 아슬아슬한 돌멩이의 탑. 처음 마히토에게 쌓아보라고 했을 때, 마히토는 순수하지 않다고 거절한다. 두번째 권유마저 마히토는 거부한다. 마히토에게 이종 세계를 물려주려는 큰 할아버지에 반발한 앵무새 왕은 소리친다. "이런 돌멩이 따위에 이 세계를 맡기시는 겁니까?" 앵무새 왕이 돌탑을 무너뜨리자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마히토와 키리코는 현실 세계로, 히미는 어린 시절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이 모든 일은 운석이 떨어진 자리에 세워진 신비한 탑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탑의 특수한 능력으로 마히토가 한바탕 꿈같은 환상을 겪은 것으로 일견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이 100% '상상'일 수 없는 것은 이종 세계에서 마히토가 직접 확인한 내용이 실제로 존재했던 (하지만 한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 키리코의 젊은 모습과 엄마의 소녀 시절 모습과 추억 그리고 큰 할아버지라는 '사실'이라는 점 때문이다. 심지어 이종의 세계에서 마히토는 자신 스스로의 세계를 재창조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에 마히토는 현실의 세계를 선택한다.

큰 할아버지의 신념과 변함없는 과거의 사실 그리고 미확정된 선택이 혼재되어 있는 세상. 이것은 <그대는...>이 그리고 있는 이종 세계가 단순히 동화적인 환상에 그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신학적인 서사와 철학적인 체계를 갖춘 하나의 완성된 세계관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이곳은 (물론 외계 운석이 필요하다는 대전제가 있지만) 누구든지 초대할 수 있는 이종 세계로서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시공간이다. 그 세계는 공통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는 열린 세계이자, 과거와 현실과 미래가 동시에 진행하는 평행 우주이며, 이를 통해 시공간의 어느 시점이든지 들어다볼 수 있고, 진입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을 통해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초월적 우주.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동시성(synchronicity) 현상'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그대는...>이 보여주는 이종 세계는 백 마디 말이 필요없는 놀랍고 치밀한 체계를 가진 심(心) 철학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마음을 위로하는 따뜻한 애니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다시 접속 가능한 이종 세계를 보면서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위안을 받았다.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애틋한 추억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 지우고 싶은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그대는...>은 엄마를 잃은 소년을 통해 그 바램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환상적이면서 아름답게 보여주었다. 언제든 이종 세계의 플랫폼에 들어선다면 내가 원하는 시간선으로 나갈 수 있기에 지금 당장 외계의 운석을 바랄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은 나의 믿음과 세계관을 통해 세워진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위로받는다. 이게 바로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걸작일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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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1. 22. 까지 총 6회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