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삼체'] 변화를 당하는 존재의 비극에 관하여
아래는 넷플릭스 시리즈 <삼체(3 Body Problem, 2024)>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먼 훗날. 하지만 확실한 미래에 관한 이야기
만약 지구의 멸망이 1시간 후라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
아마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에 머무르려고 할 것이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전화라도 걸어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할 것이고, 혹자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술 한 잔을 기울일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일들의 공통점은 모두 지구의 멸망과는 관계없는 점이다. 남은 1시간 동안 지구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할 수 없는 일들이 없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하고 싶은 일들을 다양하게 만든다.
그런데 지구의 멸망이 400년 후라면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400년의 시간은 일단 먼 미래다. 먼저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 어느 누구에게도 상관없는 미래다. 아니, 몇 세대에 걸친 후세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2024년을 기준으로 보면, 400년전은 1624년. 우리 한반도에서는 조선 인조 2년의 시절이다. 구체적으로는 역사책에 나와있듯 이괄의 난이 일어난 해이다. 그 시절 어느 누가 지금 현재 진행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 가자지구 군사작전에 관심이나 가지겠는가. 반대로 지금부터 400년 후는 2424년이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을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넷플릭스 시리즈 <삼체(3 Body Problem, 2024)>는 이와 같은 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상상을 제시한다.
처음엔 바람으로, 나중엔 폭우로
변화에 대응하는 첫번째 단계는 먼저 변화의 본질을 읽는 일이다. <삼체>는 영화적인 상상력이 가미된 작품이지, 현실은 아니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감독이 보여주는 것으로 읽어내면 충분할 것이다. <삼체> 속 현실에서 삼체의 위력을 인류가 경험한 첫번째 계기는 바로 '지자(智子, Sophon)'에 의한 사건들이다. 삼체인이 지구로 보낸 양자 단위의 컴퓨터이자 기계인 '지자'는 독특한 이름만큼 전지전능에 가까운 위력을 보여준다. 삼체인은 지구에 두 개의 지자를 보냈는데, 단 두 개의 지자가 양자의 형태로 움직이며 지구에서 이루어지는 과학기술 실험을 감시하거나 방해하고, 실험 결과를 왜곡시키며, 지구 문명에 관한 정보를 삼체 항성으로 보내는 스파이 역할을 수행한다. 시리즈 초반에 과학자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 그것은 지자가 인류 과학기술을 이끄는 최고 과학자들에게 카운트다운의 환상을 보이게 하여 자살하게 한 것이다.
지자는 양자 크기이므로,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도 나타날 수 있다. 1초에 수십번 지구를 회전하면서 지구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이것은 주역 8괘 중에서 바람을 의미하는 손괘( )의 본질과 닮았다. 손(巽)은 두 개의 양효 아래 하나의 음효로 구성되어 있다. 양효가 많아 가볍고 에너지가 높으면서 음효가 아래에 있어 빠르게 움직인다. 마치 바람이나 연기와 같은 것이다. 지자는 바람처럼 지구 곳곳에 돌아다니며 그 임무를 수행한다. 인류가 삼체 문명으로 인해 접하는 지금 현실의 본질은 바로 손괘를 닮은 지자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400년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지자 만으로도 존속을 위협받는 인류에게 지자를 보낸 그 문명 자체가 오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문명은 인류를 벌레라고 부르며, 파괴를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있다. 인류가 얼마나 잘 준비하여 그 충돌을 대비할 지 모르겠으나, 대혼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험난함이 느껴진다. 주역 8괘 중에서 험난함을 상징하는 괘는 감괘( )다. 감(坎)은 구덩이, 험난함을 의미하는 글자다. 위 아래 음효로 둘러싸인 양효는 보기만해도 버거워 보인다. 그 양효가 처한 상황이 바로 감괘이다. 감괘는 또한 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은 겉은 부드럽지만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400년 후에 인류가 마주할 운명의 본질은 바로 감괘이다.
<삼체> 속 변화의 본질은 바로 손괘에서 감괘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도 안에서부터의 변화가 아닌, 우주바깥에서 오는 타자에 의한 강제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외괘의 변화라고 보아야 한다. 손괘가 바람이고 감괘가 물이니, 날씨로 치면 처음엔 바람으로, 나중엔 폭우가 들이치는 형상이다. 지자가 전지전능에 가깝다고 해도 신은 아닌 것은 인간의 생각 속에는 침투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도 면벽자라고 불리우는 지구 수비 최고 책임자 4명를 지정하여 생각만으로 400년 후의 위험을 대비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무언가 약점이 있고, 이를 이용한 대응책이 나온다는 것은 아직 본격적인 어려움이라고 볼 순 없다. 거대한 태풍이 몰려오기 전 불어오는 바람, 딱 그 수준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바람이 폭우로 바뀐다. 400년의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류 문명이 지자의 방해를 받아가며 삼체 문명을 능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학살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 그것은 험난함이다.
낮은 곳에서 끌어모으고 쌓아야
지금까지 <삼체> 속 변화가 바람에서 폭우로의 변화, 주역 8괘로 빗대면 손괘에서 감괘로의 외괘 전환이라고 하였다. 변화의 본질을 파악했으면 이제 그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변화가 외괘에 있으니, 대응에 대한 괘는 내괘에 배치해야할 것이다. 어떤 괘가 적당할 것인지는 주역 8괘를 하나씩 넣어가며 전체 그림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정답은 없다.
'내가 만약 <삼체>에 처한 현실 속 인류라면...'이라는 상상을 하며, 나는 태괘( )를 골랐다. 태(兌)는 '기쁘다'의 의미를 갖고 있는 글자로, 형상으로는 연못에 해당한다. 태괘는 부드러운 음효 하나가 양효 두개를 누르고 있다. 속에 강한 에너지가 축적되어 있지만, 겉으로는 낮음과 고요함으로 억눌려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이 가득찬 호수나 연못을 연상시킨다. 정적이되, 결코 유약하진 않다.
태괘를 고른 이유는 손괘에서 감괘로 외괘가 변화할 때, 태괘가 내괘에서 상황을 가장 잘 다룰 수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태괘는 속이 비어있으므로 그릇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물을 담기에는 그릇이 제격이다. 태괘가 가지는 물상이 연못이라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연못은 어떠한가. 몸을 낮추어 물을 담는 그릇이다. 스스로 낮추지 않으면 물을 담을 수 없다. 태괘의 가장 위 효가 음효인 것처럼 <삼체>를 마주하는 인류의 리더는 스스로 비어있어야 한다. 그래야 아래 강성한 양효를 담는다. 남은 400년 동안 지자의 방해공작을 물리치면서 인류의 과학기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재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강력한 리더십보다는 포용력있는 리더십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즉, 전 인류차원에서 낮은 곳에서 인재를 끌어모으고, 과학기술력을 쌓아가야한다. 태괘는 바람이 폭우가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연못과 같은 정신으로 대응할 것을 보여준다.
두터운 믿음과 신뢰만이 어려움을 관리할 수 있다
변화(손괘에서 감괘로)와 대응(태괘)의 괘를 조합하여 대성괘를 만들면 아래와 같다. (참고로 8괘는 소성괘, 8괘를 겹친 64괘를 대성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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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부분은 외괘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변화를 보여준다. 변화의 방향은 왼쪽(현재)에서 오른쪽(미래)이다. 그리고 검은색 부분은 내괘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변화에 대한 대응을 보여준다. 지금 이 순간의 대응은 현재와 미래에 있어 동시에 의미를 가지므로, 하나의 괘가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변화에 모두 대응하는 결과를 낳는다. 현재 상황을 의미하는 왼쪽 괘는 손괘가 위에 태괘가 아래에 배치된 풍택중부(風澤中孚)괘이다. 풍은 손괘가 상징하는 바람이고, 택은 태괘가 상징하는 연못이다. 실제 이름에 해당하는 중부(中孚)는 믿음, 신뢰를 의미한다. 삼체인의 위협에 공동대응하는 인류의 자세가 낮은 곳에서 끌어모으고 실력을 쌓아가는 모습이라면 여기에는 반드시 믿음과 신뢰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제 미래 상황을 의미하는 오른쪽 괘를 살펴보자. 이것은 위에는 감괘, 아래는 태괘로 이루어진 수택절(水澤節)괘이다. 절(節)은 절도, 절약, 절제를 의미하는 글자로, 수택절은 물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적당하게 연못에 고여있는 모습이다. 물의 험난함은 통제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온다. 물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큰 물은 댐으로 가두고, 작은 물은 그릇에 잘 담아야하는 법이다. 아무리 거친 물이라고 해도 통제될 수 있다면 농업용수, 생활용수가 되고, 갈증을 해소하는 시원한 냉수가 될 수 있다. <삼체>에서도 삼체인이 태양계에 도착할 때 커다란 위기가 도래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두터운 믿음과 신뢰로 한 몸이 되어 커다란 그릇처럼 그 리스크를 통제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인류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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